히브리서에서 증거하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단지 가나안 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사모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조상이라 자부하는 아브라함이 메시야가 오실 때와 그분이 통치하고 다스릴 나라를 사모했는데, 정작 그 후손들은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이 아니라는 것을 꼬집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신앙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에 이삭 대신 준비하신 숫양이 곧 장차 오실 메시야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것이 곧 메시야가 오실 것임을 믿었습니다.
또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는 것보다 나그네로 있으면서 더 나은 본향, 메시야가 다스리실 그 나라를 사모하다가 죽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간 믿음의 동력이었고, 힘든 나그네 삶을 이겨낼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메시야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약 성도들은 어떠합니까? 오히려 구약 성도보다 못한 소망과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심각한 영적 퇴보입니다. 아브라함보다 더 많은 메시야에 대한 계시를 받았음에도, 메시야의 십자가 사랑과 성령의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메시야의 나라와 다시 오심을 사모하지 않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와 사도들은 어떠했습니까?
바울은 자신이 사도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께서도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라 하시며 주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명의식을 가지라 하셨습니다. 성경의 맨 마지막 장에서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으로 성도들이 가져야 할 최고의 갈망이 곧 주의 재림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간절히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요, 더 나아가 주의 신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무관심하다는 것은 영적으로 심각한 퇴보가 이루어진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것은 신앙 성숙의 척도요, 신부의 최고의 덕목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진실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에서 전도와 선교 프로그램이 많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정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고 메시야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하는 것입니까? 그런 마음이 적다면 어찌 그리스도의 신부요, 제자라 할 수 있습니까?
구약 성도 다니엘은 하루 세 번 기도하며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것이 총리직을 지키고 그 지위를 누리는 것보다 더 즐거워했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이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는 얼마나 더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까?
정말 진짜 신부인지 가짜 신부인지 구분하는 척도가 주님 사랑과 순종, 재림 사모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진짜 깨어있는 교회인지 아닌지 아는 척도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갈망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초대교회처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간절히 부르짖는 종말론적 신앙, 종말론적 신앙 공동체를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말씀기도를 하시는 여러분들이 그 종말론적 신앙 공동체를 가정에서, 소그룹에서 세우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주님은 곧 오십니다!